떠날 준비, 돌아가며
바다를 건너서, 하늘을 날아서⋯
식기세척기 마른 그릇을 꺼내 서랍장에 쌓아넣는다. 싱크대를 솔질한다. 냉동실 얼음틀을 꺼내 물을 붓고 얼음을 얼린다. 재활용 쓰레기를 비운다. 반도 안 찼지만 음식물 쓰레기도 버린다. 더운 날에는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참기 어려운 냄새가 나니까.
‘타월’ 모드로 세탁 후 건조시킨 수건을 차곡차곡 개켜 욕실 서랍장에 넣는다. 세면대 거울 앞 흐트러진 로션 통과 머리핀, 오일이 널브러지고 자꾸 떨어지는 게 거슬려 주방에서 쓰던 바구니를 하나 비운 뒤 화장실로 가져와 정리해 담는다. 다 쓴 치약을 버리고 새 치약으로 바꿔두려 창고를 뒤지다 못 찾고 포기한다.
고양이 화장실에서 삽으로 배변을 퍼내 봉투에 담아 쓰레기통에 버린다. 혹시 그 새 또 초파리가 생기거나 알을 까진 않았는지 체크한다. 책상 아래 하나, 옷방 거울 옆 하나 고양이 정수기 케이블을 빼내 물을 새로 한 번 갈아준다. 부엌 서랍장 아래칸 사료 포대를 꺼낸 뒤, 고양이 사료통으로 쓰는 밀폐용기를 채워넣는다.
새로 산 매트리스가 왔다. 이불 커버와 베개 커버를 꺼내 ’침구’ 모드로 세탁기와 건조기를 연달아 돌린 뒤, 베개와 이불에 씌우고 시트를 매트리스 위에 덮는다. 이틀간 충분히 환기 시킨 뒤 방수 커버를 씌운다. 침대를 샀던 집 근처 매장에 방문해 눈독 들였던 새 베개를 주문한다. 침실 바닥, 하는 김에 거실도 진공 청소기를 한 번 돌린다.
건조기에 있는 그녀의 빨래를 꺼내 책상 위에 종류별로 개어둔다. 빨래를 올리다 보니 책상에 똑같이 생겨서 맨날 헷갈리는 USB-C 케이블 – 하나는 충전기, 하나는 모니터 – 이 눈에 밟힌다. 충전기 쪽 케이블에 종이 테이프를 감아 표시해둔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나트랑으로 놀러 왔다. 한 때 무척 친했던 사이가 많이들 그러하듯 특별한 이유 없이 각자의 삶이 바빠지며 멀어졌지만, 24년 초 정기적으로 등산을 같이 다니면서부터 다시 자주 보고 있다. 모임에서 세부, 제주도, 속초 등 몇 차례 여행을 다녔는데 이번 여행이 개중 가장 긴 일정이다.
긴 여행은 곧 배우자를 혼자 두고 집을 비우는 날이 길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같이 살기 시작한 이래 하진은 학회 때문에 일주일 남짓 해외에 나갔던 적이 있지만, 내가 이 정도로 오래 비운 적은 처음이다. 임신한 상태라 더더욱 그렇지만, 여행에 대한 기대가 커질수록 혼자 두고 떠나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부채감 역시 늘었다.
그런 마음을 보상하려는 양, 이삼일 전부터 떠날 준비를 했다. 집에 혼자 있을 하진의 하루를 상상하며, 뭔가 필요하거나 미세한 턱에 걸릴 상황을 하나씩 그려보며 그마다 조금이라도 편하게, 덜 외롭게 만들 방법을 찾아보았다. 생각보다 할 일은 많고 시간도 잘 갔다.
준비를 하다문득 생각했다. 고작 오 일 집을 비우는데도 이렇게 챙겨야 할 게 계속 떠오르는구나. 내가 만약 먼저 죽는다면 그 때는 어떨까. 며칠은 커녕 남는 이들의 여생을 생각할텐데, 아무리 해도 그 준비가 끝나지 않겠구나. 바구니로 바닷물을 퍼내야 하는 이처럼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 생각을 하니 서글프다. 그따위 준비는 하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상대에게 시키고 싶지도 않다. 무엇이 더 낫고 무엇이 더 나쁜지 선택이 불가능한, 오답 뿐인 질문처럼 느껴진다. 머리 속에서 생각 자체를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와 조금도 상관 없게도 우리 중 누군가에게 그 순간이 찾아올 것을 확실하게 알기에 더 서글프다.
그러나 바꿀 수 없다면 미리 걱정은 무의미. 떠나야 할 날이 조금이라도 덜 아쉽고 덜 후회하기 위해선 살아있는 매 하루를 충실하게, 마지막인 듯 살아가는 것 말곤 방법이 없으리라. 늘 떠날 준비를 하는 마음으로, 늘 너에게 돌아가며 살아야지, 소리내어본다. 이상하지만 묘하게 맞는 기분이 든다.
더운 나라의 리조트는 휴양지로 더할 나위 없다. 오전과 낮에 열심히 먹고, 약간의 러닝, 헬스와 상당한 수영을 한 뒤 나른한 상태로 방에 들어와 씻고 침대에 누워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앞으로 또 언제 올지 모를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즐겁지만, 마음 한 구석은 이미 슬그머니 한 뼘씩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바다를 건너서, 하늘을 날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