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과 벌판
핸들을 잡을 수가 없다면 암만 빨라도 난 그저 손님인데
적절한 때 유효한 피드백을 주는 요령의 필요성을 요즘 들어 자주 느낀다. 공부를 하긴 해야지– 생각만 하다가, 예전에 좋게 읽은 『실리콘밸리의 팀장들』이 문득 떠올랐다. 핵심 개념를 제외하곤 기억이 흐릿해, 다시 읽으면 또 새롭게 얻는 게 있을 것 같아 이번 주에 다시 펼쳤다.
책 초반에는 성장 궤도에 따라 나뉘어지는 직원의 두 분류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그는 최고의 성과와 더불어 점진적인 성장 궤도를 보여준 이들을 ‘록스타’라고 불렀다. 록스타는 팀에서 지브롤터 암벽처럼 든든한 존재다. 이들은 자기 일을 사랑하고 최고의 역량을 갖췄지만 스스로 팀장이 괴리를 원치 않는 유형, 혹은 스티브 잡스와 같은 리더가 되기를 원치 않는 유형이다. 그들은 지금 자리에 만족한다.
반면 급격한 성장 궤도를 보이는 직원, 1년 동안 같은 자리에 있으면 미쳐버리게 될 직원을 ‘슈퍼스타’라 불렀다. 슈퍼스타는 팀 성장의 원천이다. 그는 록스타와 슈퍼스타의 균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
록스타는 브루스 스프링스틴 같은 유명한 록 가수가 아니라, 지브롤터 암벽과 같은 튼튼한 기반을 뜻한다. 록스타는 그들의 일을 사랑하고 자신만의 리듬에 따라 움직인다. 그들은 지금의 일을 포기하면서까지 승진을 원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록스타의 역할을 존중하고 충분히 보상할 때, 그들은 리더가 가장 의지할 만한 사람이 된다. 반대로 원치 않거나 어울리지 않는 역할을 맡길 때, 그들을 잃을 위험이 있다. 더 나쁜 경우, 해고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슈퍼스타는 지속적인 자극과 더불어 끊임없이 성장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피드백 잘 하는 법을 배우려 잡은 책인데 갑자기 생각이 샛길로 흘렀다.
이 분류에 따르면 나는 ‘록스타’ 보다는 ‘슈퍼스타’ 유형이다. 일을 시작하고부터, 아니 사실은 그보다도 한참 전인 프로그래밍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때부터 성장·새로운 도전을 찾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나를 움직였던(움직이는) 질문은 결국 항상 이 둘 중 하나의 연장선에 놓여있었다.
- 이 다음엔 뭐가 있지?
- 그걸 빨리 보려면 지금 뭘 해야 하지?
학생 때 뭣도 없이 극초기 스타트업의 개발 도우러 가는 친구 따라 미국행 비행기에 탄 것도, 특강 수업 끝나고 다짜고짜 여쭤봐서 여름 인턴을 경험한 것도, 산업기능요원 복무하면서도 회사를 두 번이나 옮긴 것도 다 그 질문들 때문이다. 덕분에 그간 밀도 높은 경험을 쌓으며 빠르게 성장해왔다.
하지만 올해 핀 꽃이 작년에 핀 꽃보다 일 년 어치 더 아름답지 않다고 그 가치가 덜하지 않듯, 세상 모든 일에 ‘다음 단계’가 있지는 않을 터이다. 삶을 언제나 이런 자세로 대하며 많은 걸 배우고 얻었지만 반대로 무언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진 않을까.
2019년 가을엔 이런 생각을 하고 여기저기 기록으로 남겨뒀다.
인생은 계단이 아니라 벌판이다– 라고 믿기로 했다.
인생이 계단이라면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올라가거나, 정체되거나, 떨어지는 것 뿐이다. 정체되거나 떨어질 수 없으니 어떻게든 위로 한 발짝 또 떼고 나면 땀 한 번 닦고 그 다음 단을 오르기를 언젠가 더 이상 못 오르는 순간을 만날 때까지 반복하는 일.
하지만 인생이 벌판이라면 우리는 가만히 누워 구름 흐르는 걸 바라보고, 취해서 춤 추고, 고양이와 낮잠도 잘 수 있다. 가끔 계단도 오르겠지만, 언제라도 내려와 쉴 수 있고, 사실 세상에는 수많은 계단이 존재하며 무엇을 언제 어떻게 오를지는 오롯이 내 선택일 것이다.
다짐은 다짐일 뿐, 가끔 정신차려 보면 또 계단인 듯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 어려운 세상에, (초)성장이 지상과제로 여겨지는 스타트업 업계에 몸 담고 있다보니 쉽지 않겠지만… 그 믿음이 흐려지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