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한 사랑』

그것보다 멋진 영화의 힘, 카메라의 힘, 이야기의 힘이 또 무엇이 있을까.

가능한 사랑 스틸

안문원 님은 과거 뉴코아 노동조합의 지도위원이자 민주노총 전국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서비스연맹)의 사무처장을 역임한 노동운동 관련 인물입니다.

구글에 “뉴코아 안문원”을 검색하니 이런 문구가 나온다. 얼추 맞는 설명 같지만 얼마나 정확한지는 사실 알 수 없다. 아빠가 노조 일을 한창 하던 때 나는 열살이 될까말까 했으니. 구체적인 기억은 나지도 않는다. 뜨거운 아스팔트 바닥, 삼촌이라 부르던 회사 아저씨들의 얼굴, 인터넷 바둑 같은 스쳐지나가는 이미지들과, 조금 더 머리가 굵었을 때 가졌던 ‘아빠는 노동조합 일을 했었다’라는 자부심 정도만이 떠오른다.

이야기 할 장면으로 가득 찬 영화였지만 안문원의 아들로서는 이런 장면들을 짚어보고 싶다.

옥쇄파업 시작 무렵 노동자와 가족 모두가 비슷한 촌스러운 옷을 맞춰입고 앉은 모습. 누군가의 선창에 따라 모두가 주먹을 앞뒤로 휘두르며 후창하는 구호. 음질이 찢어지는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투쟁의 노래. 부모를 따라온 아이들을 앉혀놓고 불러주는 과수원 길. 참여했던 이들이 ‘축제 같았다’라고, ‘인생에서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싶을 정도로 행복했다’고 말하는 풍경.

그 풍경을 스크린에서 보는데 그럴만한 장면이 아닌데도 눈물이 차올랐다. 잊었던 기억이 갑자기 소환될 때면 하릴없이 멱살을 끌어잡혀 흔들거린다.

우리는 졌어요, 바를 정 자를 쓰는 정의한테 졌어요, 그게 너무 분해요⋯ 말하던 얼굴. 언제는 나를 노동 귀족이라 부르더니 이제는 빨갱이라고 부르냐며, 잘못한 것도 없이 짤렸는데 니들이라면 가만히 있을 거냐⋯ 라는 말을 결국 못 하고 급한 일이 생겼다며 먼저 자리를 뜬 술자리. 억지로 지은 웃음이 집에 오는 길에도 지워지지 않았다는, 그래서 화날 때 웃으면 안 된다는 걸 배웠다는 헛웃음.

긴 시간을 할애해서,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이들에게 쥐어준 마이크가 감격스러웠다. 이 이야기를 영화관에서 이 많은 사람들과 보고 듣고 있구나, 괜히 상영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아빠는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뉴코아를 그만뒀다. 정확히 왜 그만두어야 했는지는 모른다. ‘회사에게 밉보였겠느니’ 어렴풋이 생각한 정도. 중고등학생 때 학교에 부모에 대한 글을 써내야할 때가 있었다. ‘아빠는 대기업에 들어갔지만 노동조합을 하다가 잘렸다’는 식으로 쓴 걸 보여줬을 때 그런 게 아니라 정정하던 아빠의 굳은 얼굴이 어렴풋하다. (이제는 넌지시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 과정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에 대해.)

뉴코아를 나온 이후 아빠는 몇 가지 일을 전전했다. 자동차 연비를 늘리는 운전 습관 형성을 도와준다는, 요새 말로는 하드웨어 스타트업에 들어가 몇 년 일했지만 결국 잘 안 됐다. 엄마와 아빠가 함께 우유 배달 대리점을 차렸던 적도 있다. 세상엔 구리 선을 잘라 훔쳐가는 사람이 있단 걸 그 때 처음 배웠다. 중간 중간 일이 있으면 틈틈이 지방 내려가 일용직으로 노가다, 도배 일도 했던 걸로 안다. 아무튼 뉴코아 이후 몇 년 동안은 집안 형편이 매우 빡빡했다.

어린 마음에도 이 상황이 언젠가 해결이 될 수는 있는 걸까? 막막하던 때도 있었는데, 살던 아파트 단지 재건축 조합에 아빠가 취직한 이후로 대단하진 않아도 안정적인 수입이 생겼다.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호석과 미애의 가정은 (적어도 영화에서 보여지기론) 맞벌이에 호석도 금방 재취업하고, 해고 전에 비해 경제적인 어려움을 크게 겪진 않는 듯 해 보였다. 그게 맞다면 그 부분만큼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빚을 내어 생활하고 학원비를 냈던 달도 있던 걸로 기억한다. 나와 동생이 한창 크고 공부하던 시절이라 엄마와 아빠는 우리에게 미안해 했던 것 같다. 노조 활동 없이 회사에 충성했더라면 아빠는 꽤 오랜 기간 회사에 다녔을 수 있었기에 더더욱 그랬을까. 내 입장을 말해보자면, 애가 둘 딸린 상황에서도 본인이 옳다고 생각한 대로 행하고 지지할 수 있었던 젊은 남녀의 용기가 그저 멋지고 자랑스럽다.

영화를 보면서 어쩔 수 없이 나의 부모와 겹쳐지는 호석과 미애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들은 잘못하지 않았다. 올바르다 믿는대로 행한 당신들의 모습을 철이가 보고 있으며, 이 아이는 기억할 것이다. 그러니 꼭 이겨내라.

상우의 저택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복직 안 되면 어떻게 하냐는 미애의 질문에 호석은 “살아야지.” 라고 답한다. 그 말이 눈물나게 반가웠다. 그렇지. 살아야지.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아빠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다음 카페에 가족의 사진과 영상을 연도별로 차곡차곡 아카이빙 해두었다. 이 글을 쓰면서 쟁의 현장 사진이 남아 있을까, 카페에 들어가 “파업”, “투쟁” 등을 검색해보았다. 찾으려던 사진 대신 이게 나왔다.

그런, 하루가 멀다하고 수상한 소식들이 들려오는 세상에서도 유난히 제 눈에 밟히던 소식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회 곳곳에서, 비록 티는 별로 나지 않지만 묵묵히 이 사회를 돌아가게 만들고 있는 노동자 분들의 소식들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우리 학교 청소노동자 분들은 물론이거니와, 인천공항 비정규직 청소노동자들에 대한 용역업체와 공항측의 불합리한 처우가 이슈가 되기도 했고(이 투쟁은 여전히 진행중입니다), 한 삼성전자서비스센터 하청업체 수리기사가 ‘너무 힘들었다’는 내용의 글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습니다. 여당의 한 국회의원께선 국회 운영위원회 질의에서 나온 국회 청소용역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 요구를 두고 “이 사람들 무기계약직 되면 노무관리문제도 그렇고, 이제 노동3권 보장돼요. 툭하면 파업 들어가고 할 텐데… 이것을 어떻게 관리하겠나?” 라는, 헌법에 반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지만, 별 문제 없이 넘어갔지요. 그리고 이번 주, 민영화 반대를 위한 철도노조의 파업에 대한 코레일의 ‘해결책’은 7천명이 넘는 노조원의 직위해제와, 주동자들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 엄포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 고작 스무살입니다. 많이 어리고, 또 부족하지요.

하지만 그렇게 부족한 저도 우리 사회가 어떤 모습이여야 하는가에 대한 조그마한 신념 하나는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직업을 막론하고 하루하루를 정직히, 또 열심히 살아내는 사람에게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주어져야 올바른 사회다’라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고, 또 우리 자식들에게 물려줄 이 대한민국은 그런 사회인가요? 전 자신 있게 ‘그렇다’라고 답하지 못하겠습니다. 앞서 언급한 부조리들 역시 겉으로는 우리와 별 상관없는 노동자들의 일일 뿐이지만, 결국 어찌 보면 사회에서 가장 약자의 위치에 처해있는 이들의 삶을 빌려 나타나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은 아닐까요. 약자에 대한 배려 없이, 오로지 자본의 논리, 힘의 논리로만 돌아가는 콘크리트 정글이라는 단면 말이지요.

2013년,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대자보 운동이 전국적으로 불던 때 카이스트 학관 앞에 써붙인 대자보. 구체적인 내용은 오래전 기억에서 사라진 글을 간만에 읽으며 ‘내가 이런 글을 썼었구나’ 새삼 놀랐다. 지금의 나는 이런 글을 써서 붙일 용기가 있는지. 그럴만큼 신경을 쓰고 있는지. 둘 다 아닌 듯 하여.

노동 문제에 대해 대단한 당사자성을 가진 양 썼지만 사실은 시간이 흐르며, 우리 가족도 나도 그로부터 점점 멀어져만 온 듯 하다. 일을 시작하고 몇 년, 어느정도 안정적이고 대우도 (내 딴엔) 괜찮은 생활이 지속되니 점점 뉴스를 보기 싫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랐다.

대단하게 버는 것도 아닌데, 좀 살만하니 신경을 쓰기 싫네? 내 앞가림만 하고 싶네?

2019년, 지금 회사에 합류할 때 기뻤던 여러 이유 중 하나는 그런 멀어짐을 뒤집을 수 있겠다는, 노동 문제의 사회적인 해소에 작게나마 일조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었다. 몰라서 못 지키는 사람도 많을텐데, 적어도 있는 법은 잘 지킬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줄 수 있겠다. 이게 기술의 순작용이지.

막상 일해보니 B2B 사업이란 게 늘 상상했던 대로만 흘러가진 않았다. 그런 보람을 느낄 순간도 없진 않았지만, 세상엔 법을 안 지키고 싶은 겁 없는 회사도 많고, 반대로 내가 봐도 너무하다 싶을만한 직원들도 많고, 돈 내고 쓰는 서비스가 고객에게 어떠한 가치를 주장하고 가르치려 드는 건, 엄청나게 영향력이 생긴 후라면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건방지고 위험한 일이고⋯

스스로가 점점 자랑스럽지 않아도 그냥 다들 이렇게 나이 먹는 건가 생각하며, 면죄부를 사듯 정기적으로 몇몇 단체에 작은 후원금만 보내며. 회사에서 이따금 ‘그래도 근로자 관점에서 이건 아니지 않냐’며 화도 내고, 그러면서도 대부분 결국 받아들이며.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대자보를 써 붙인 스무살은 지금의 나를 어떤 눈빛으로 바라볼까. 투쟁이니 연대니, 그런 말이 제일 싫어요. 그거 다 거짓말이잖아요⋯ 영화를 보는데 이 말이 나를 향한 말처럼 들려서 아팠다. 고작 이게 아프다니 싶은 마음에 부끄러워 더 아팠다. (계속)

가능한 사랑 스틸

『가능한 사랑』이란 제목은 영화 내에선 무엇보다 예지의, 즉 창작자의 윤리에 대한 물음으로 들린다. 영화를 보고 나오며 과연 이 질문이 꼭 찍는 자와 찍히는 자, 재벌과 서민이라는 극단적인 입장차 위에서만 유효한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다르게 묻는다면, 우리는 어떤 거리부터 사랑이 불가능하다 느끼는가?

그 한계 거리는 갈수록 짧아지는 것 같다. 버스 기사들이 어떤 불합리함 때문에 파업했든, 장애인들이 보장하라며 시위하는 이동권이라는 게 정확히 무엇이든, 아무튼 나의 때맞은 출근을 방해하는 일이라면 짜증부터 나는 것처럼. 가족 내지는 늘 살 부대끼는 범위를 조금이라도 넘어선 이에 대한 사랑이란 많은 경우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그 불가능성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알 수 없음’이 큰 자리를 차지하리라. 알 수 없는 이유는 보이지 않고 볼 일이 없기 때문일테고. 코끼리가 사라지듯 눈 앞에서 사라지는 건 비단 노동 뿐만이 아니다. 다른 생각을 가진, 다른 삶을 사는 타인 모두를 눈 앞에서 치우고도 얼마든 살아갈 수 있는 세상에 우리는 하루가 달리 다가가고 있으니.

그렇다면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서로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까. 둘이 선 다른 자리 사이 도랑을 뛰어넘고, 불완전할지언정 사랑이 가능하다 믿고 시도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문제로부터 답변 또한 자연스레 드러나는 듯 하다.

우리는 서로 알아야 한다. 알기 위해선 많은 노력과 진심이 들고 쉽지 않겠지만, 그 전에 우선 알고 싶어해야 한다. 알고 싶어지려면 그 계기, 타인의 삶을 상상해볼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할테고. 그 계기는 대단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저 이가 어떤 일을 겪고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지, 섣부른 판단을 내려놓고 그저 바라보는 몇 시간이면 충분할 지도.

집단 상담 장면이 반가웠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적어도 여기서 이를 보는 동안은 우리 함께 눈 돌리지 못하고 이 얼굴을 보고 그 삶을 상상할 테니. 그 시간이 누군가에겐 잊고 있던 유년기의 기억을 끌어올릴 부표가, 누군가에겐 뉴스에서 마주한 파업 소식에 습관적인 판단을 내리기 전 걸림돌이, 그리고 누군가에겐 내 말을 세상이 듣고 있다는 작은 위안이 될 테니.

이창동 감독은 이 이야기를 만들며 감독으로서 피사체를 향한 사랑에 내포된 불가능성에 대해 많이 고민한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그 자신의 것과는 다를지 모르지만, 어떤 또다른 불가능했던 모양의 사랑을 조금은 가능에 가깝게 빚어낼 씨앗을 뿌렸다 느낀다. 만약 정말 그러했다면 그것보다 멋진 영화의 힘, 카메라의 힘, 이야기의 힘이 또 무엇이 있을까.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구조적인 해법 없이 개인적인 수준의 알아감을 이야기하는 게 지나치게 나이브한 접근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가 “자본에게서 독립”하지 못하고 상우, 아니 넷플릭스와의 결혼을 통해서만 만들어졌단 아이러니가 떠오른다.) 그럼에도 수많은 개인들의 작은 꼬물거림이 모여 결국 세상을 바꾸는 군무가 만들어지는 일도 얼마든 있기 마련 아닐까. 아니 오히려 그 방법 뿐일지도.

이러나 저러나. 다른 이도 아닌 이창동 감독이 이런 영화를 만들어줘서 좋았다. 극장에서 만날 수 있어 더욱 좋았다. 또 보고 싶다.


이하 글의 대주제와는 벗어나지만 남겨두고 싶은 단상들.

  • 엔딩이 굉장히 로맨틱하다고 느꼈다. 솔직히 이런 식으로 끝날 줄 몰랐는데 당했다⋯
  • 처음 달이 등장한 쇼트에서. 화면 상의 변화 없이 달을 오래동안 비추며 미애의 내레이션만 조곤조곤 얹혀지는데 마법에 빠진 기분이었다. 매우 길었음에도 끝났을 때 아쉬웠다.
  • 호석의 새 직장이 나오는 쇼트가 세 개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보여주지 않았더라도 전체적인 이야기의 진행에는 지장이 없었을 장면들이지만, 보여줘서 좋았다. 새 직장 동료들이 아주 친절하진 않아도 나쁜 사람들 같지 않아보여서 마음이 놓였다. 다치지 말고 잘 지냈으면.
  • 예지는 분명히 뚜렷한 한계를 지닌 사람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그녀의 사랑하려는 시도가 모두 거짓, ‘메소드 연기’로만 이루어져 있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믿고 싶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한들, 거리를 좁히는 일에는 첫 발걸음이 필요하지 않을까.
  • 미애의 자유에 대해 박수.
  • 촬영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다이나믹⋯? 하다고 느꼈다. 개인적으로는 (특히 초반에는) 약간 정신없는 느낌이 들었어서 조금 더 차분했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