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쥬 드 아난티
원한다면 언제든 빌라쥬 드 아난티에 묵을 수 있는 삶은 어떨까.

1.
원한다면 언제든 빌라쥬 드 아난티에 묵을 수 있는 삶은 어떨까. 아무래도 그렇지 못할 때보단 더 행복할까?
2.
6년 근속으로 받은 3주 유급 휴가가 끝났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나트랑, 배우자와 후쿠오카, 양가 가족과 부산 여행을 다녀왔다. 마지막 부산에선 빌라쥬 드 아난티라는 고급 숙소에서 묵었다. 회사에서 휴가와 함께 제공해준 2박 3일 숙박권 덕이었다.
방과 거실 모두에서 보이는 기장 바다와 용궁사 전망은 기가 막히고, 침구와 어메니티는 하나같이 깔끔하면서도 포근했다. 너무 많아 별도의 안내 지도가 필요하던 실내 및 야외 수영장은 살면서 가본 개중 가장 넓고 관리가 잘 돼 보였다. 로비, 방, 복도까지 하나같이 층고는 높고 공백도 충분한 공간에 내 마음도 넉넉해지는 듯 했다.
첫 날은 배우자의 동생 부부, 둘째 날은 내 양친을 초청해 함께했다. 그들도 즐거워했다. 엄마는 몇 번이고 말했다. “정말 숙소가 너무 좋다, 우리 앞으로도 같이 이런 데 더 자주 다니자.” 물론 아들과 함께라면 어디든 안 좋겠냐만은– 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그 말을 들으니 마음 속 뭉근하게 끓던 불편함이 형체를 갖추고 떠오른다. 나는 앞으로도 이런 곳에 더 자주 다니고 싶은지 모르겠다고. 이 정도는 부담 없이 누릴 수 있게 ‘더 열심히 사는’ 삶이 내게 맞는지 고민되고, 여기서 좋았던 순간마다 한편으론 동시에 묘한 씁쓸함이랄지 불안함, 뛰쳐나가고픈 기분을 느꼈다고.
그러나 좋은 마음으로 던진 말에 이런 답은 내가 생각해도 영 이상한 반응이라, 웃으면서 말을 슬쩍 돌려본다. 복잡한 속과는 무관하게 기뻐하는 부모를 보니 나 또한 기쁘다.
3.
첫날엔 짐을 풀자마자 하진과 주된 야외 수영장을 찾았다. 해가 지기 시작한 시각인데다 세찬 바닷바람 덕에 쌀쌀했지만, 막상 물 속에서 움직이다보면 몸이 금세 더워졌다. 그럼에도 첫 발을 담글 때만큼은 아찔할만치 차가워서인지, 단지 평일이어서인지 사람은 거의 없어 넓은 수영장을 둘이 전세 냈다.
눈 닿는 풍경마다 예쁘고 방만하다. 멀리 기장 바다에서 파도가 바위에 부딪혀 바스라진다. 해질 무렵 수평선 위는 보랏빛으로 물들고, 구름은 누군가 길게 찍어둔 말줄임표처럼 비슷한 높이에 점점이 줄 서 있다. 배영하듯 누워 바라본 하늘엔 간격을 두고 우뚝 선 매끄러운 흰색 건물들 사이로 까마귀떼가 날갯짓하며 알 수 없는 무늬를 그린다.
입술이 퍼래질 때쯤 나와 젖은 수영복을 입은 채 방에 돌아오는 길, 단지 내 건물을 하나씩 둘러본다. 문을 닫은 베이글 가게는 메뉴가 참 다양하다. 매점엔 식료품은 물론 ‘대체 여기서 이런 걸 사는 사람은 누구지’ 의문이 들만큼 러그, 접시, 올리브유까지 온갖 물품이 구비되어 있다. 의외로 충실한 서적 코너 구성에 잠깐 놀란다.
호텔 건물 일 층 브런치 가게도 오늘 영업은 마친 시각. 내일 아침을 여기서 먹을까– 메뉴판을 보니 커피가 만 원이 넘고 브런치가 삼사만원. 잔인한 범죄 현장 사진이라도 본 양 빠르게 고개를 돌린다. “방에 캡슐 커피가 있던데 아까 베이글 사서 그거랑 먹자!” 공범이 된 듯한 웃음을 나누며 걷는다.
저녁바람은 딱 좋을만큼 서늘하게 서걱거려 기분 좋게 피부를 간지럽힌다. 여긴 뭐랄까 한 마디로, 참 쾌적하다.
다른 지점들은 어떨지 궁금하고, 이번에 못 온 장인 장모님, 동생도 데리고 와보고 싶다. 회원권 가격을 찾아본다. 억이 넘네. 그런데도 방값은 몇십씩 또 따로인데다 그마저도 예약이 힘들다니. 예전에 친구가 이야기한 비슷한 컨셉의 하이엔드 별장 회원권, 그건 얼마더라? 아 얘도 비슷하구나.
4.
나는 달콤한 상상에 빠진다.
억이 넘는 돈을 박아 두고도 일박에 몇십쯤 아무렇지 않게 내는 삶에 대하여. 이 수영장과 숙소가 늘 손닿는 곳에 있다면 얼마나⋯ 안락할까. 여기까지 와서 배달시킨 저녁을 받으러 주차장까지 걸어나가는 대신 룸서비스를 양껏 시켜먹는 풍족함, 바깥의 두 배가 넘는 가격이 찍힌 메뉴판 앞에 주저없이 카드를 내미는 산뜻함에 대한 공상.
이러한 상상은 – 내가 자주 그러하듯 – 달콤한 채로 끝나기 전 옆 길로 샌다. 그러한 삶을 위해 치룰 대가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으로. 장기 근속과 황금 (혹은 황동) 수갑, 낯선 이들과 널뛰는 숫자가 선사할 끊임 없는 스트레스, 복종과 삼킨 말과 감은 눈 따위에 대한 재잘거림으로.
세상엔 공짜가 없다고들 한다. 가격표를 보지 않을 수 있는 삶에 붙는 가격표엔 무엇이 적혀 있으려나.

5.
삶의 궤적마다 찍힌 점들은 늘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연결된다.
나는 무언가를 얻자마자, 또는 얻기도 전부터 그걸 유지보수하기 위한 비용부터 고민하는 게 익숙하다. 아무래도 프로그래머로 일하던 시절에 본격적으로 내 동작 원리 중 하나로 자리 잡은 습관인 듯 하다. 일터에서 적용하고자 하던 원칙이 일터 밖으로 넘쳐흐른 셈이다.
물론 이러한 습성은 프로그래머라는 직군보다는 실은 나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정말 복잡하고 어렵고 수십가지 방식으로 잘못될 수 있지만 엄청난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일에 본능적으로 더 흥미를 느끼고 덤벼드는 동료들도 늘 있었으므로. 단지 내가 천성적으로 그런 방향으로 끌리지 않았던 것 뿐이다.
시간이 갈 수록 물건을 살 때도, 관계를 늘릴 때도 – 단순히 처음 구매할 때의 가격을 떠나 – 자신에게 자주 묻는다: ‘이걸 가꾸는 데 필요한 게 무엇인가?’, 그리고 ‘그걸 기꺼이 지불하고 싶은 마음이 진정 드는가.’
답하며 살다보니 어느새 강제적으로 미니멀리스트가 되어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6.
지난 삼사년, 나의 머리 한 구석엔 이러한 단어들이 얼기설기 얽힌 채로 자리하고 있었다:
나의 소시민성. 야망의 크기 (보다 정확히는 야망의 부재). 적당함. 좁지만 고요한 울타리.
나는 ‘당연히’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가져야 하는가? 삶은 살아있는 한 누구에게나 투쟁과 전진이어야 마땅한가? 어릴 땐 다른 가능성이 있으리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질문들이다. 나이를 먹으며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단 마음이 새싹 돋듯 고개를 쳐들지만, 정작 그렇게 답하려 할 때면 왠지 모를 수치심이 느껴진다.
또한: 물건이든, 음악이든, 음식이든, 인테리어든⋯ 무엇이 진정 좋은지 알게 되고, 자연스레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을 민감하게 구분하는 (구분할 수 밖에 없는) 안목은 과연 개인에게 축복일까? 혹은 그로 인해 견딜 수 없는 어떤 상황들이 누군가에겐 저주로 작용할 수도 있을까.
7.
몇 달 후엔 아이가 세상에 나온다. 그걸 생각하니 문제가 조금⋯ 아니 더 많이 복잡해지는 것 같다.
너에게 충분한 것이 너의 아이에게도 충분할 것이냐? 그렇지 않다면 어쩔 셈이냐?
너의 아이를 위한다면 늘 더 많이, 더 좋은 것만을 주려 해야 할 것이냐? 그러나 더 많이, 더 좋은 게 무엇인진 누가 정한단 말이냐?
부모와 함께 수영하는 저 해맑은 아이들을 보라. 네 아이에게도 저 나이 때 이런 추억들쯤은 선사할 수 있어야 멋진 아빠라고 할 수⋯ 있으려나⋯?
8.
2019년엔 소셜 미디어에 “인생은 계단이 아니라 벌판이다– 라고 믿기로 했다.”라고 적었다. 2021년에 같은 문장을 조금 더 늘여 『계단과 벌판』 이라는 글로 적었다.
(⋯) 인생이 계단이라면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올라가거나, 정체되거나, 떨어지는 것 뿐이다. 정체되거나 떨어질 수 없으니 어떻게든 위로 한 발짝 또 떼고 나면 땀 한 번 닦고 그 다음 단을 오르기를 언젠가 더 이상 못 오르는 순간을 만날 때까지 반복하는 일.
하지만 인생이 벌판이라면 우리는 가만히 누워 구름 흐르는 걸 바라보고, 취해서 춤 추고, 고양이와 낮잠도 잘 수 있다. 가끔 계단도 오르겠지만, 언제라도 내려와 쉴 수 있고, 사실 세상에는 수많은 계단이 존재하며 무엇을 언제 어떻게 오를지는 오롯이 내 선택일 것이다.
다짐은 다짐일 뿐, 가끔 정신차려 보면 또 계단인 듯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 어려운 세상에, (초)성장이 지상과제로 여겨지는 스타트업 업계에 몸 담고 있다보니 쉽지 않겠지만… 그 믿음이 흐려지지 않길 바란다.
플렉스 근속 칠 년을 바라보는 시점에, 육 년 근속 장기 휴가를 마치는 글을 쓰며, 일 년 반쯤 다닌 시점에 적은 글을 들춰보고 있다. 누구에게나 주기적으로 반복해 찾아오는 주제들이 있다면 내겐 이 계단과 벌판의 이미지가 바로 그것인지 모르겠다. 이번이 마지막도 아닐 거란 예감이 든다.
같은 주제를 이렇게 오래 붙잡고 있으면서 아직까지 명확한 결론을 못 낸 듯한 자신이 사실은 다소 한심하다. 다를 바 없는 원만 반복해 그리는 듯 보이는 궤적이지만, 고개를 꺾어보면 실은 조금씩 위로 나아가는 나선일까? 그러길 바랄 수 밖에.
원한다면 언제든 빌라쥬 드 아난티에 묵을 수 있는 삶은 어떨까. 아무래도 그렇지 못할 때보단 더 행복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