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xRESIST』
꼭 한 번 시간을 내서 플레이해보길 강하게 권장(부탁)한다.

『1000xRESIST』는 일국양제와 2047년, 거대한 붉은 억압자, 우산 혁명과 홍콩 민주화 운동, 천 번의 저항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세대에서 세대로 유전되는 트라우마, 부모와 딸과 딸의 딸과 딸의 딸의 딸, 자매–복제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동시에 원죄, 이념과 종교, 성전과 경구에 대한 이야기이다. 또한 아시아 디아스포라, COVID-19와 그를 둘러싼 인종적 시선에 대한 이야기이다. 무엇보다 되풀이되는 역사와 기억, 저지른 실수와 벌어진 상처, 질투와 이해, 응징 또는 용서, 어디에 선을 그어 무엇을 버리며 무엇을 안고 나아갈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열 시간 남짓한 플레이타임 안에서 얕거나 산만해지지 않고 이 모든 것을 온전히 다룬다는 불가능해보이는 과제를 달성해냈단 게 개발진의 역량의 방증이다.
제작사 「sunset visitor 斜陽過客」는 4명의 풀타임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밴쿠버의 인디 게임 스튜디오다. 이들은 시각 예술, 춤과 연극, 작곡 및 무대 조명, 뉴미디어 아트 등 게임 개발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각자의 커리어를 쌓아가며 만난 사이다. 그러던 중 COVID-19로 인해 주된 창작 및 생계 수단인 공연 기회가 사라졌다. 이에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선택한 수단이 게임이었다. 『1000xRESIST』는 그들의 첫 게임이다.
이러한 팀의 역사는 결과물에 진하게 녹아들어있다. 이 게임은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법을 알고 있다. 게임 속엔 “빨강이 파랑 되기를”, “여섯이 하나로”과 같은, 말버릇처럼 되뇌여지며 상황에 따라 여러 의미로 해석되는 경구들이 등장한다. 재밌는 점은 게임 자체의 소재와 이야기 역시 그러한 수많은 해석의 방향을 내포한다는 점이다.
그러한 서브텍스트를 동작하게 하는 동력은 다음과 같다: 함축적인 대사, 챕터 별로 파격적으로 전환되는 (여러 의미의) 시점, 시공간을 깨트린 뒤 뒤섞어 내미는 비선형적 스토리텔링, 주술적으로 반복되는 앰비언트 전자 음악 등. 게임 속 마법적 순간이 게임과 무관한 개발진의 기존 배경에 기대고 있음이 명백하게 느껴질 때마다 하릴없이 감탄했다. 우리가 전혀 동떨어져있다 생각한 것들이 사실 맞닿아 있음을 발견하는 일은 얼마나 잦은지!
게임 속엔 아시아계 이민자로서의 개인사, 모국에 대한 억압과 저항의 역사, 게임을 만들게 된 계기인 COVID-19, 게임이라는 매체와 스토리텔링 등의 다양한 소재에 대한 개발진의 지극히 개인적인 사유가 가득하다. 그러나 이 모두는 인류 멸망 후 마지막 남은 복제인간들의 이야기 속에서 결국 누구나 일부분 깊게 공감 가능한, 보편성을 획득한 무언가로 재탄생한다. 모두가 서로를 지지하는 동시에 받쳐내며 무너지지 않는 구조물을 엮어낸 솜씨가 경이롭다. 브라보!
물론 장점만 있지는 않다. 대표적으로 이 게임에는 실질적인 게임 메카닉이 전무하다. 실패 상태가 (한 부분을 제외하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게이머의 행동은 대사를 읽고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이동하며 스토리를 감상하는 게 전부다. 사건이 제시되는 순서 자체는 조각났고 비선형적이지만, 게임의 진행은 반대로 곧은 직선의 컨베이어 벨트 위를 달려간다. 그 외에도 대사나 길 찾기 등 소소한 편의성 문제들도 존재한다.
따라서 게임을 끝낸 후, 감탄하면서도 ‘과연 게임이어야 했는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처음엔 아닌 것 같았으나, 곱씹어보며 다른 매체, 예컨대 공연이나 책, 영화로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을지 회의적이게 되었다. 일례로 이야기의 핵심 소재인 ‘교감 의식’부터가 게임을 매체로서 구별짓는 가장 큰 특징인 상호작용성과 정면으로 맞닿아있다. 이 이야기는 이 방식으로, 내가 직접 체험했을 때 비로소 온전히 전달될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같은 스케일을 다른 매체로 구현하려면 맞닥뜨릴 예산 등 현실적인 문제도 있을 것이다.)
이 게임의 ‘게임성’ 부족은 역설적으로 평소에 게임을 즐기지 않는 이들에겐 진입 장벽을 낮춰주는 원인이기도 하다. 뛰어난 컨트롤이나 전략적인 사고가 전혀 필요 없으므로 마우스나 키보드만 쓸 줄 알면 누구나 플레이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리뷰가 흥미롭게 느껴진다면, 서두에 언급한 소재들 혹은 스토리텔링이라는 주제 자체에 대한 관심이 있다면, 꼭 한 번 시간을 내서 플레이해보길 강하게 권장(부탁)한다. 나 역시 몇 번 더 플레이할 생각이다. 이 글에서 다 못 풀어낸 감상을 친구들과 열심히 떠들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