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사소한 것들』
손을 씻으려는 한 사람에 대하여.
봐 버린다. 본 것에 대해 고민한다. 끝내 결심하고 행동한다.
어찌 보면 이게 전부인 영화다. 표면적으로는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 사람의 안에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흔들리고 있음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클레어 키건, 『이토록 사소한 것들』)
나는 신을 믿는 데 성공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커가면서 – 영화, 드라마, 게임, 음악까지 영미권의 컨텐츠의 잡식성 소비자가 많이들 그리 되듯 – 이야기로서의 성경과 등장 인물들에 관심을 키워왔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합리적이며 쿨한 분이었으라는 나름의 판단도 갖게 되었고.
예수님의 발걸음을 따르는지가 교회나 성당을 열심히 나가는 일과 그다지 관련 없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종교와 무관하게 모두가 그의 뜻을 살펴 살려 노력한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좋은 곳이리라 확신키도 한다.
펄롱은 석탄을 판다. 트럭 운전대를 잡고 석탄 마대자루를 어깨로 들쳐매는 하루가 끝나면 그의 차, 옷, 얼굴과 손은 땀과 석탄 가루로 늘상 더러워진다.
집을 둘러싼 결계를 통과하는 의식인 양, 영화에는 귀가한 펄롱이 손을 씻는 장면이 반복된다. 너무 빳빳해서 전복이나 흙당근을 닦을 때나 써야 할듯한 솔을 써서. 어느 날은 손이 말끔해지고, 어느 날은 손에서 피가 나지만, 그는 손을 씻으려는 사람이다.
만약 인류의 파괴 기술이 점점 더 발달해서 언젠가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사라진다면, 그 멸종의 원인은 인간의 잔인성이 아니다. 그 잔혹함이 일으킨 분노, 그리고 그 분노가 가져올 보복 때문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일반 대중의 온순함과 책임감의 결여, 그리고 모든 부당한 명령에 대한 비굴한 순종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 온 끔찍한 일들, 또 앞으로 일어날 더욱 전율할 만한 사건의 원인은, 이 세상 여러 곳에서 반항적이고 길들여지지 않는 사람의 수가 늘어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순하고 순종적인 사람의 수가 계속 늘어난다는 것이다. (조르주 베르나노스)
한때는 스스로를 ‘반항적이고 길들여지지 않는’다고 여겼다. 중고등학생 시절 부당하다 생각하는 일이 있다면 교무실, 교장실을 들이받았다. 대학생 땐 ‘안녕들하신지요’ 대자보를 써붙이고, 회사에서도 손을 들길 주저하지 않았다. 화가 날 때도 화를 낼 때도 많았다.
시간이 지나 지금은 그랬던 내가 아득하게 느껴진다. 더 많은 입장을 이해하면서, 더 잃을 게 많아지면서, 더 피곤해지면서⋯ 남이 아닌 나를 위해 삼키는 말이 늘었다. 거울 속 ‘온순하고 순종적인’ 자신을 발견할 때가 점점 잦다.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르겠지만, 옳은가?
펄롱이 딸들을 생각했다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누군가는 말할지 모르겠다. 그의 아내도, 자주 찾는 가게의 주인도 그에게 직간접적으로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펄롱이 딸들을 생각했기에 그럴 수 밖에 없었으리라 본다. 학대받는 한 여자 아이에게서 사랑해 마지않는 그녀들을 보지 않을 수 있었을까? 맛있는 음식, 좋은 학교보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는 세상을 그녀들에게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이히만이 말한 것처럼 자기 자신의 양심을 무마시킨 가장 유력한 요소는 실제로 최종 해결책에 반대한 사람을 한 명도, 단 한 명도 볼 수가 없었다는 단순한 사실이었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영화는 행동의 결과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 다음에 일어날 일이 아닌, 그가 세라의 손을 잡고 나오기로 결정한 것만이 중요하다’ 말하듯 집으로 향하는 긴 여정을 묵묵히 따라간 뒤 문을 들어선 후 끝난다. 그 자리에 ‘나라면 저럴 수 있을까?’, 그리고 ‘나 역시 그래야 하지 않을까?’ 두 질문이 묵직하게 남는다.
그러므로 ‘봐 버린다. 본 것에 대해 고민한다. 끝내 결심하고 행동한다.’ 라는, 사실을 담았지만 진실과는 먼 앞선 문장보다는 이렇게 말하는 게 영화에 대한 더 적절한 소개일 듯 하다:
봐 버린다. 본 것이 누군가의 세계를 송두리째 흔든다. 그 진동은 한 사람의 내면에서 넘쳐나와 그가 속한 세계에도 작은 균열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켜보는 화면 밖의 나 역시 잊었던 작은 꿈틀거림을 새로이 느낀다. 라고.